환대를 디자인하다

2016. 8. 31. 16:48 - Arts in Mission Korea

확산하는 제노포비아

두려움이라는 뜻의 포비아(phobia), 그리고 이방인을 혐오한다는 뜻의 제노포비아(xenophobia). 이 단어처럼 요즘 전 세계에서 외국인 혐오가 걷잡을 수 없이 솟구치고 있다. 매년 필리핀 단기선교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자기 교회에 나오는 필리핀 사람을 미워한다면? 이슬람권 선교사를 후원하는 성도가 자기 일터의 무슬림 근로자를 부당하게 대우한다면? 교회에서 다문화 사역을 하지만 정작 자기 자녀들이 다문화 가정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한다면? 이처럼 선교적이지 않은 선교 행위가 가능하다.

 

팀 켈러는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가 복음의 가치와 어떻게 정면으로 대치되는지 다음과 같이 통찰한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들의 비난이 두려워 자리를 피한 베드로에게 바울은 "당신은 인종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어겼소."라고 말하지 않고, "복음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바울은 인종적 편견이 은혜의 구원 원칙 자체를 부인하는 거라고 주장했다. 인종적 자부심과 문화적 편협함은 은혜의 복음과 공존할 수 없다. 이들은 상호 배타적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밀어낸다.


제노포비아와 정반대 뜻을 가진 단어가 바로 로마서 12장 13절에서 ‘hospitality’[각주:1]로 번역된 그리스어 '필로제니아(philoxenia)'이다바로 낯선 자를 향한 사랑(love of stranger)’이라는 뜻이다피부색이 다른 이방인과 국적이 다른 외국인을 향한 혐오가 들끓는 시대에 예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복음이 담고 있는 환대의 가치를 어떻게 디자인할 수 있을까? 몇 가지 방법을 살펴보자.

 

시각적 환대

우리는 시각적으로 불과 몇 초 안에 사람들로부터 환영받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감지할 수 있다. 아무도 나와 눈을 맞추지 않고, 아무도 찾아와 말 걸지 않고, 이해할 수 있는 표지가 하나도 없다면, 그 순간 환영받는다고 느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선교한국 2016 대회 '움직이는 지구관'에 전시된 현수막은 여러 언어로 '환영(welcome)'을 소통한다

이런 현수막이 걸린 행사장과 예배당을 상상해 보자. 자기 언어로 적힌 환영 인사말을 보는 즉시 환대받는다고 느낄 수 있다. 얼마 전 열린 복음주의 로잔 차세대 지도자 대회는 여러 나라 참가자를 고려해 통역은 물론 다양한 언어로 책자와 현수막을 준비했다.

 

환대는 내적 태도이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가시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시각예술과 디자인은 문화를 초월해 환대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영역이다. 선교한국 2016 대회에 150여 명의 외국인 참가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이 최대한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한국어 찬양 가사를 번역하여 영어 자막을 준비했는데, 작은 부분이지만 생각보다 큰 노력과 시간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무심코 지나가는 작은 부분으로 인해 상대는 예배에서 시각적으로 소외될 수 있다


하루는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던 중 케냐 사람을 만났다. 혹시 몰라 어디로 가냐고 물어봤는데, 그 사람은 반대로 가는 열차에 타고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노선도와 시스템이라도 외국인에게는 어렵기 마련이다. 일상과 예배 속 시각적 환대의 소외 지역은 어디인지 찾아보자. 그리고 시각적 환대를 디자인하자.

 

청각적 환대

얼마 전 다민족 젊은이들과 함께한 예배예술캠프에서 난민으로 이란에서 미국으로 온 청년을 만났다. 아직 영어가 서툰 이란 청년은 캠프에서 사용하는 영어의 절반 정도만 이해하며 따라올 수 있었다. 어느 날 리더십 팀에서 그 청년을 위해 그의 언어인 파시(farsi)어 노래를 불렀다. 미국에서는 낯선 자신의 언어로 캠프의 모든 참가자가 노래하자 이 젊은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는 이란에 남겨둔 채 아버지와 미국에 와서 힘들게 살고 있던 이란 청년에게 참가자 모두가 그의 언어로 찬양을 불렀을 때 과연 어떤 느낌이었을까? 우리는 이후로도 몇 번 더 파시어로 노래를 불렀고, 이 젊은이는 나중에 파시어로 노래를 작곡해 모두 앞에서 부르기도 했다.


선교한국 2016 대회 중 외국인 참가자들을 예배 중에 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들 중 자원자를 받아 무대에 세우고 미리 그들의 언어를 물은 뒤, 모두에게 잘 알려진 곡을 여러 언어로 돌아가며 부르는 시간을 가졌다. 그중에는 버마의 소수 민족 가운데 혼자 대회에 참가한 자매도 있었다. 천 명이 넘는 사람이 모인 자리에 조미(Zomi)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그 자매뿐이었어도 그녀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다. 언어는 문화의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다. 더듬거리더라도 상대의 언어를 배우고, 상대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상대의 이름을 기억해 불러주는 청각적 환대가 필요하다.

 

미각적 환대

레너드 스윗은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의 삶을 정말로 알고 싶다면 식탁에 앉아 함께 식사하는 것이 가장 좋은 출발점이다...예수님은 모든 부류의 사람과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식탁에 앉아 다양한 음식을 드셨다...예수님은 식탁에서 떡을 뗌의 의미도 재정의하고 가족 됨의 의미도 새롭게 정의하셨다.”

 

식탁으로의 초대는 미각적일뿐 아니라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이 총동원되는 전 존재적 환대이다. 식탁으로의 초대는 존중과 환영, 용납을 의미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식사로 초대하는 것은 한 존재를 환대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주로 사회 변두리에 거하는 외국인의 경우 주류 사회의 현지인 가정에 초청되는 경우가 드물다고 한다. 미국에서 유학 중인 외국 학생 중 백인 중산층 가정에 가본 적이 없는 경우가 많고, 한국에 거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 가정에 초대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얼마 전 혼자 미국에서 유학 중인 20대 중국인 학생을 알게 됐다. 그 친구를 집에 초대해 정성껏 한국 음식을 대접했다. 비록 중국 음식은 아니었지만, 쌀밥과 국이 있는 아시아 음식이라는 점만으로도 그녀 마음은 활짝 열렸다. 이 한 번의 식사는 지속적인 교제로 이어졌고, 얼마 전 이 자매가 우리 부부에게 멘토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밥을 대접한 것은 아니었지만, 존재를 용납하고 환대하니 자연스레 깊은 관계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무언가를 돌려받을 계산 없이 오직 상대의 존재를 기뻐하고 환대하기 위해 식사를 대접한 적이 있는가? 좀처럼 초대받지 못하는 이를 초대한 적은 언제인가? 예수님은 대부분이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던 소외된 이들과 식사하기를 즐기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친히 사람과 식사하시고 초대하시고 또 초청받으셨다. 심지어 기독교 예배의 가장 핵심적인 예전(liturgy)마저도 먹고 마실 때마다 그를 기억하도록 장치해놓고 떠나셨다.

 

나가며

혐오의 시대에 환대는 그 자체로 카운터컬처의 메시지가 된다. 시각 예술가는 환대를 시각적으로 디자인해보자. 음악가는 환대를 청각으로 표현해보자. 모든 그리스도인은 식탁을 열어 전 존재적인 환대를 실천해보자. 진정한 환대를 실천하는 곳 어디에나 하나님이 임재하신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 떼제 찬양

(Ubi caritas et amor, ubi caritas Deus ibi est - Taizé)


: 김재우 (프로스쿠네오)

편집: 장지혜

배너디자인: 김석범 (디자인엔트)


  1. ESV 기준. 한국어 개역개정엔 ‘손 대접’으로 번역되어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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